통계적으로 이상한 날들
27화. 노트
이 작품은 AI로 생성되었으며 사람이 검수·수정했습니다.
『확률과 일상』. 1학년 1학기. 내 글씨.
노트는 절반쯤 채워져 있었다. 강의 내용, 과제 메모, 조별 발표 일정. 나는 페이지를 넘겼다. 기억이 안 나는 것을 내 글씨로 읽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몇 달 전 이서의 원고 여백에서 내 글씨를 봤을 때와 같은 기분이었다.
그런데 이번엔 여백이 아니었다. 본문이었다.
5월 둘째 주 페이지. 조별 발표 일정 아래에, 내 글씨로, 세 줄.
옆 조 발표자. 목소리 작은 사람. 지난주 출석 부를 때도 두 번 불림. 발표 순서 먼저 하겠다고 하기. 뒤에 일정 있다고. — 그 사람 발표 안 해도 되게.
나는 노트를 든 채로 오래 앉아 있었다.
7년 전 5월 둘째 주. 그러니까 발표 전 주. 나는 이미 그 사람을 보고 있었던 것이다. 출석 부를 때 두 번 불리는 사람을. 목소리가 작아서 교수가 못 들은 사람을. 그리고 나는 그 사람이 발표를 못 할 것을 알았고, 미리 계획을 적었다.
발표 순서 먼저 하겠다고 하기. 뒤에 일정 있다고.
그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설계였다. 내 첫 설계. 일주일 전에 적어 놓고, 그날 손을 들고, 원고 여백에 한 줄을 쓰고, 그리고 — 잊어버린 것이다. 나한테는 그냥 그날이었으니까.
이서는 그것을 처음 받은 우연이라고 했다. 그래서 우연으로 돌려줬다고 했다. 4년 동안. 그런데 그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이 사람이 4년 동안 갚은 것은 우연이 아니라 설계였다. 표본의 기원이 뒤집혔다.
나는 그 세 줄을 다시 읽었다. 그리고 하나를 더 발견했다. 세 줄 아래, 아주 작게, 한 줄이 더 있었다. 나중에 쓴 글씨였다. 볼펜 색이 달랐다.
발표 다음 주. 그 사람 이름 신이서. 통계 파트 잘함. 숫자 맞음.
숫자 맞음. 원고 여백에 쓴 것과 같은 말. 그런데 이것은 여백이 아니라 내 노트에 쓴 것이었다. 남한테 보여 주려고 쓴 게 아니라, 나 보려고 쓴 것.
7년 전에 나는 이 사람 이름을 노트에 적었다. 그리고 잊어버렸다. 4년 뒤에 이 사람이 내 옆자리에 앉았을 때, 이름을 두 번 물었다. 목소리가 작아서. 7년 전에 출석 때 두 번 불렸던 것과 똑같이.
그때 나는 그 이름을 두 번째로 들은 것이 아니었다. 세 번째였다.
일요일 하루 종일 나는 계산을 했다. 이것을 말할 것인가.
말하면 이 사람의 4년이 바뀐다. '처음 받은 우연'이 '처음 받은 설계'가 된다. 이 사람이 자기 문법의 기원이라고 믿은 것이 사실은 내 문법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우연으로 돌려줬다고 했는데, 돌려준 상대는 처음부터 설계하는 사람이었다.
무거운 정보다. 이 사람 기준으로는.
그런데 안 말하면 — 그것은 정보를 숨겨서 유도하는 것이다. 이 사람이 4년 동안 절대 안 한 것. 선택 조작. 이 사람의 선택은 이 정보를 알고 나서 이루어져야 한다. 이 사람이 나를 계속 볼 것인지, 어떤 눈으로 볼 것인지.
계산은 오래 안 걸렸다. 정면으로 한다. 이 사람한테 배운 것이니까.
월요일 아침 8시 20분, 나는 7층에 올라갔다. 아무도 없는 시간. 초콜릿을 놓던 시간.
이번엔 초콜릿이 아니었다. 노트였다. 나는 그것을 이서 자리에 놓지 않았다. 놓으면 우연이 되니까. 대신 들고 서 있었다. 창가에서 두 번째 자리 옆에. 모니터가 기운 자리.
8시 40분에 이서가 왔다. 나를 보고 멈췄다. 손에 든 노트를 봤다. 표지의 글씨를 읽었다.
『확률과 일상』.
이서의 얼굴에서 뭔가가 움직였다. 놀람이 아니었다. 굳음도 아니었다. 처음 보는 것이었다. 7년 전 그 원고를 여백까지 외운 사람이 같은 수업의 노트를 보고 있었다.
"…그거."
"제 거예요. 1학년 때."
"…"
"읽어 줄 게 있어요. 정면으로. 앉아요."
이서가 자기 자리에 앉았다. 두 손을 무릎에 놓았다. 손을 비웠다. 중요한 것을 받을 때.
나는 5월 둘째 주 페이지를 폈다.
— 28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