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이 반복되면
18화. 열여덟 번째 핀
이 작품은 AI로 생성되었으며 사람이 검수·수정했습니다.
"핀 하나 줘."
내가 말했다.
그는 서랍에서 핀 통을 꺼냈다. 빨간 것과 파란 것. 열일곱 개는 전부 빨간색이었다. 나는 파란 것을 하나 집었다.
그리고 지도로 갔다. 서울 전도. 회사 앞 골목. 11번부터 17번까지 빨간 핀이 모여 있는 반경 300미터. 그 한가운데.
작업실.
파란 핀을 꽂았다.
"…여기가 뭐야."
"내가 있는 자리."
그는 지도를 봤다. 파란 핀 하나. 빨간 핀 열일곱 개 사이에.
"네가 10년 동안 찍은 건 내가 있던 자리잖아. 방금 나간 자리. 이건 그거 아니야. 지금 있는 자리야. 여기. 이 방."
"…."
"그러니까 안 찍어도 돼. 찍는 건 없어질 걸 남기는 거잖아. 이건 안 없어져. 내가 여기 있으니까."
그는 파란 핀을 오래 봤다. 그리고 손을 뻗어서 핀을 만졌다. 뽑지 않고. 그냥 거기 있는지 확인하듯이.
"…이거 뽑히면 어떡해."
"뽑히면 내가 다시 꽂아. 네가 아니라 내가."
말하고 나서야 내가 뭘 약속했는지 알았다. 약속인 줄 모르고 한 약속이 제일 오래 간다.
그날 밤, 우리는 옥상에 갔다.
작업실 건물 옥상. 소행성 B-17이 아니었다. 다른 옥상. 그런데 그는 라디오를 가져왔다. 안테나가 반쯤 접힌, 낡은 것. 열다섯 살 때 것이었다.
"이거 아직 있어?"
"응. 고장 났는데 못 버렸어."
"고장 났는데 왜 가져왔어."
"…버릇."
우리는 옥상 난간에 나란히 기댔다. 그가 라디오 다이얼을 돌렸다. 소리가 안 났다. 그래도 돌렸다. 88.1에서 손이 멈췄다.
"여기서 잡히면 재밌겠다."
"안 잡혀. 고장 났잖아."
"응. 근데 여기서 멈추는 건 손이 알아서 해."
그가 라디오를 내려놓았다. 난간 위에. 그리고 나를 봤다. 옥상의 어둠 속에서. 반 박자가 아니라 같은 박자로.
"서하야."
"응."
"나 10년 동안 옥상에 있었어. 세 번째 편지에 쓴 대로. 네가 어디 있는지 몰라도 되게. 내가 어디 있는지 네가 알면 되게."
"응. 읽었어."
"근데 너 옥상 안 왔잖아. 10년 동안."
"편지를 못 봤으니까."
"응. 그래서 —"
그의 문장이 거기서 잠깐 끊겼다. 나는 기다렸다. 이 사람이 자르는 자리에서 내가 이어야 하는 문장이 있다는 걸 알았지만, 이건 내가 이을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내가 내려왔어. 옥상에서. 네 회사 앞으로."
"…응."
"그게 처음이야. 내가 건너온 거. 10년 만에."
나는 그것을 이제야 알았다. 회사 앞 골목의 작업실. 우연이 아니라고 그가 인정한 유일한 자리. 그것은 감시의 자리가 아니었다. 옥상에서 내려온 사람이 처음으로 건너편이 아니라 이편에 선 자리였다.
"무서웠어?"
"응. 지금도."
"뭐가."
"네가 안 오는 거. 왔는데 가는 거. 가는데 어디로 가는지 모르는 거."
"그래서 어디로 가는지만 알려 달라고 한 거고."
"응."
나는 난간 위의 라디오를 봤다. 고장 난 것. 88.1에서 멈춘 것.
"도하야. 나 안 가."
"…."
"파란 핀 꽂았잖아. 그거 뽑히면 다시 꽂는다고 했잖아. 그러니까 이제 옥상에 안 있어도 돼. 내려와도 돼. 아니, 이미 내려왔잖아."
그는 오래 아무 말도 안 했다. 그리고 웃었다. 온화한 쪽도, 서툰 쪽도, 찍히는 사람의 것도 아닌 네 번째 웃음이었다. 나는 그것에 이름을 붙이지 못했다.
내려오는 계단에서 그의 폰이 울렸다. 그는 화면을 보고, 나를 보고, 받았다.
"네, 실장님."
갤러리 강 실장이었다. 첫 개인전을 열어 준 사람.
"…네. 네. 열두 점 전부요? …아니요, 그건."
그가 멈췄다. 계단 중간에서. 나는 그의 얼굴을 봤다. 온도가 내려간 것이 아니었다. 그냥, 굳어 있었다.
"…생각해 보고 연락드릴게요."
그가 전화를 끊었다.
"뭐래."
"해외 아트페어에서. 열두 점을 전부 사겠대."
— 19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