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시에 없던 회의가 생겼어
24화. 안 도망친 날
이 작품은 AI로 생성되었으며 사람이 검수·수정했습니다.
"내기 조건 재설정."
다음 날 점심, 옥상 벤치. 김밥. 회의 주재자.
"77번부터 100번까지. 23번 남았어. 그 23번 동안 한 번도 안 도망치면 내가 이기는 거."
"저번 조건이랑 같잖아."
"저번엔 백 번이었고 이번엔 23번이야. 판이 작으면 이기기 쉬워."
"…그거 회계 용어야?"
"몰라. 그냥 맞는 말이잖아."
나는 김밥을 씹으며 계산했다. 하봄이 도망친 열한 번은 전부 내가 정면으로 한 직후였다. 그러니까 23번을 안 도망치려면 내가 23번을 안 하면 됐다. 그런데 그러면 100번이 안 찬다. 이 내기는 구조적으로 서로 반대였다.
"너 이거 내가 정면 안 하면 자동으로 네가 이기는 거 알아?"
"알아. 근데 너 안 할 거야?"
"…할 건데."
"그러니까. 내기 성립."
23번의 첫 번째는 그날 오후였다.
회의실. 기획·개발 주간 회의. 노 팀장님, 장 팀장님. 열 명. 관객 열 명 넘으면 다섯 배 — 하봄이 만든 규칙이었다.
내가 개발 현황을 발표했다. 끝나고 노 팀장님이 물었다. "기획 쪽 코멘트." 하봄이 말했다. "없습니다." 2년 동안 내가 하던 것을 하봄이 하고 있었다. 회사에서는 동기, 규칙이 팀장님한테서 나온 뒤로.
"개발 쪽은?"
장 팀장님이 나를 봤다. 열 명이 나를 봤다.
여기서 안 하면 하봄이 이긴다. 여기서 하면 다섯 배다.
"있습니다."
하봄이 자료를 잡았다.
"하봄 씨 주간 기획, 3번 항목. 개발 일정이랑 안 맞습니다. 이틀 당겨야 합니다."
정면이었는데 업무였다. 하봄이 나를 봤다. 그리고 웃었다. 안심한 웃음.
"…네. 이틀 당길게요."
"그리고."
웃음이 멈췄다.
"입술 깨물고 쓴 항목이 3번입니다. 그러니까 진짜라는 뜻이고, 진짜니까 개발이 맞출게요."
열 명이 조용했다. 노 팀장님이 팔짱을 꼈다. 장 팀장님이 기침을 했다.
하봄이 벽시계를 봤다.
"…"
벽시계가 있었다. 회의실이었다. 화장실도 있었다. 도망갈 곳이 다 있었다.
하봄이 벽시계에서 눈을 뗐다. 자료를 놓았다. 그리고 나를 봤다. 정면으로.
"…네. 3번 진짜예요. 맞춰 주세요."
회의가 끝났다. 노 팀장님이 나가면서 말했다. "…회사에서는 동기라고 했는데." 장 팀장님이 대답했다. "업무잖아요. 일정 얘기." "…그런가."
복도. 하봄이 창문에 이마를 안 댔다. 대신 벽에 등을 기댔다.
"나 지금 안 도망쳤어."
"봤어."
"벽시계 봤는데 안 나갔어."
"봤어."
"…이거 몇 번이야."
"78번. 다섯 배면 82번."
"…내 쪽은?"
"1번. 안 도망친 거."
하봄이 벽에서 등을 뗐다.
"…이거 되게 이상한 기분이다."
"뭐가."
"도망치는 게 습관이었는데, 안 도망치니까 — 그냥 서 있는 거잖아. 네 앞에. 열 명 앞에서."
"응."
"…이게 받는 거구나."
던지는 데 2년, 받는 데 석 달이 걸렸다. 받는 쪽이 더 오래 걸리는 사람도 있다.
그 주 금요일, 옥상. 캔커피.
"없던 회의 안 생겨?"
내가 물었다. 정면을 한 직후였다. 82번에서 90번 사이 어딘가. 세는 것보다 보는 게 중요해진 뒤로 숫자가 흐려졌다.
하봄이 나를 봤다. 벽시계는 없었다. 그런데 이제 벽시계가 있어도 상관없었다.
"…안 생기네."
낮게.
"3시에 없던 회의가 안 생겨. 처음이야. 2년 만에."
"…"
"네가 정면으로 해도 나 그냥 여기 있네."
하봄이 캔을 난간에 내려놓았다. 내가 백한 번째를 하던 밤에 내려놓았던 그 자리에.
"그 내기 내가 이기고 있어. 근데 이기는 기분이 아니야. 다른 기분이야."
"무슨 기분."
"…이유는 안 알려줌."
포장이었다. 그런데 오늘 포장은 도망이 아니었다. 포장 안에 뭐가 있는지 나도 알고 하봄도 알아서, 그냥 포장인 채로 둔 것이었다.
월요일 오전, 노 팀장님이 하봄을 불렀다. 회의실 C. 작은 방. 문이 닫혔다.
20분 뒤 하봄이 나왔다. 자기 자리로 갔다. 모니터를 봤다.
점심시간에 옥상 벤치에서 하봄은 김밥을 먹었고, 회의 주재자 얼굴이 아니었고, 팀장님이 뭐라고 했는지 말하지 않았다.
"팀장님이 뭐래?"
"…업무 얘기."
2년 동안 하봄은 나한테 '업무 얘기'라고 한 적이 없었다. 업무든 아니든 전부 던지는 사람이었다.
그날 밤 재민이한테서 메시지가 왔다.
「노 팀장님이 하봄이 신사업 리드로 밀었대. 부산. 6개월. 하봄이한테 들었지?」
못 들었다.
— 25화에서 계속